성예교회 "더불어 성장하는 삶 공동체"

비통과 불쌍히 여김의 간극(하방연대, 요 11:17-38, 롬 12:15-16)

설교통

비통과 불쌍히 여김의 간극(하방연대) (11:17-38, 12:15-16)

 

1.예수님의 사명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의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이 땅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타락해 있기에 자신의 욕망 충족을 가장 우선시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자신의 욕망 추구를 위해 남용함, 에덴동산 선악과 사건) 이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서로 연대할 수 없고, 연대함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해 외부의 강제력으로 욕망의 절제시키고 서로 연대하도록 강제함으로 외형적 연대를 이루었습니다.(이스라엘) 그러나 강제된 연대는 내면적 연대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외식, 위선)

 

예수님은 내면적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랑이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만이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한 연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을 때에라야 비로서 타인의 불완전에 대해 연민과 긍휼함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용서와 화해의 연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사랑의 본질은 육체적 본능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용서와 화해입니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중심성(교만,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에게 말씀을 통해 권면하거나, 고난 중에 침묵하심으로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도록 조성하십니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한 자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불완전성에 대해 덜 엄격해집니다. 불완전한 자신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사랑안에 거하듯이 타인의 불완전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할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타인의 불완전성에 대해 엄격하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과 타인의 불완전성을 용납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할수록 온유한 자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신다고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셨습니다.

(5:2-5, 개정)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에 대한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2:15-16, 현대인)

[15]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낮고 천한 사람들의 벗이 되십시오. 스스로 잘난 체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을 조롱하지 않고 진심으로 함께 슬펴해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온유한 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기뻐하는 자를 시기하고, 슬퍼하는 자를 조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우선되고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2. 본문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온유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남매였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사로가 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급하니 빨리 와서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고도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하였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난 후에야 비로서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녀는 슬픔에 젖어 예수님이 함께 있었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서운해했습니다. 마리아는 더 큰 슬픔에 잠겨 예수님을 맞으러 나오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오자마자 마르다처럼 예수에게 서운함을 표현했습니다.

 

조문을 온 사람들은 마르다, 마리아처럼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고, 급히 오지 않은 예수님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위급함을 알고도 이틀을 더 머물다 그가 죽은 것을 느끼고 나서야 온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일에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직감하고 말씀하시길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친구라 말함은 나사로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의 지인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장례에 함께 한 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일반 군중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운함으로 슬피 우는 마르다 그리고 함께 한 이들에게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일깨워 주며 그것에 대한 믿음을 물으시며 그들에 대해서 비통하고 불쌍히 여기셨다’(11:3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통 ενεβριμησατο분통, 화내다의 의미이고, 불쌍히 여기다εταραξεν 불편해하다의 의미입니다. 즉 직역하면 예수님은 그녀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하는 이들이 우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분통해하며 그들을 불편해했다.”( 33 ιησους ουν ως ειδεν αυτην κλαιουσαν και τους συνελθοντας αυτη ιουδαιους κλαιοντας ενεβριμησατο τω πνευματι και εταραξεν εαυτον) 이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11:33, 개정)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와는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원어에 따라 직역한 의미는 뭔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분인데 정작 자신의 제자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불편해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사로의 위급함을 알고도 이틀이나 더 머물다 오신 것도 일반적인 예수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이런 언행을 하신 것일까?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영원한 종말로 인식하지 않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단지 잠든 것(11:11)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깨어나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마르다와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이들의 모습은 단순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넘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믿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5절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들의 아픔에 대해 무감각한 것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잃은 자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알고 삶에서 적용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화가 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 봤을 때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함께 한 제자들의 믿음은 모두 기준 미달이었습니다. 특히 마르다와 마리아는 다른 이들보다 더 가까운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기에 이들이 가진 불완전한 신앙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위로하고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이 지닌 불완전성에 대해 비난하기보다 그들이 자신의 한계성을 깨닫고 더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하도록 돕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3. 예수의 온유를 배우라

여기에서 예수님의 온유함을 보게 된다.

(12:15-16, 현대인)

[15]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낮고 천한 사람들의 벗이 되십시오. 스스로 잘난 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쉽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도 연대하고 도우려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이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셨다면 자신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어버리고 슬퍼하는 이들을 돕기보다 책망하는데 방점을 두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부족한 이들을 대하면서 그들을 책망하기보다 돕는 것에 방점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온유함이며, 온유함의 이상적 모범입니다.

 

타인의 불완전성에 대한 연민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불완전성의 자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불완전한 타인과의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갑니다.

 

우리는 타인의 불완전성을 발견했을 때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타인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위장된 표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타인보다 더 우월한 존재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지 않습니다. 타인의 불완전함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함께 한 제자들의 불완전성을 보고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를 통해 우리가 연대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어떤 태도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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