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왕상 18:21)
설교통하나님의 뜻 (왕상 18:21)
1. 집사님과의 상담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상담을 하러 오셨습니다. 자신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서 동업 제의를 받았는데 확실히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이 술을 파는 것과 관련 된 업종이라 그리스도인으로써 선 듯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민 되던 중에 기도를 많이 하는 한 권사님에게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권사님이 몇 일 후 꿈에서 집사님의 집에 돼지들이 득실거리는 모습을 보았다며 하나님이 사업을 하라고 보여주신 것이라며 사업을 하라고 권면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다시 한 번 목사님에게 확인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제 의견을 묻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 이 분이 친구가 제안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종종 이 집사님과 같이 어떤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선택하면 그 결과가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가장 중요한 것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의 지식이나,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정체성의 문제이기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명확하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마치 라디오를 켜면 수많은 주파수의 방송들이 나오지만 정작 자신이 들으려는 방송의 주파수를 모르므로 계속해서 채널을 돌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해서, 어떤 이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계시 된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며, 그 해석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검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마치 교통사고가 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도 목소리가 큰 사람의 주장을 따라 해석되곤 합니다.
3. 분별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행적을 면밀히 검토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신 원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기준으로 우리가 직면한 삶의 문제들을 바라볼 때 문제를 다루는데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필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찾고 그 가운데 원리를 깨닫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행적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남겨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처음 창조에서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행적을 자세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적들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찾아내서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에 문제를 해석하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너무나 다양한 사람과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과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은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구약의 어떤 성경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하시던 하나님이 어떤 성경에서는 이방인을 향해서도 무한한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모순된 모습까지도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적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무자비한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너무나 관용적인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서로 다르게 보는 이들 가운데 충돌이 일어났고, 교회는 분열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오늘날 한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4. 예수가 기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적을 통해 하나님의 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다양하게 묘사된 하나님의 행적들 가운데서 가장 표준이 되고, 가장 분명한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다른 성경의 기록들이 하나님의 행적을 간접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은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원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 핵심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며 그 속에 드러난 원리를 따라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행적들을 다시 해석하고 이해하며, 동시에 그 원리를 통해 우리가 직면한 삶 속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같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신앙이 기준으로 삼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5. 관점의 변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너무나 명확해졌습니다. 어떤 상황,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예수그리스도의 관점’ 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분별할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명확한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자신의 감정, 경험, 지식, 신비적 체험을 자기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 있지 않다면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초반에 사업에 대해 상담을 하러 오셨던 집사님은 그 후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사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번창하였습니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집사님의 차는 더 고급차가 되었고, 집도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분이 하나님에게 큰 은혜를 받았다고 부러워했으며, 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꿈을 통해 강력하게 권면을 해주었던 권사님은 다수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인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점점 사업에 쫓겨 예배들 드리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을 통해 부부가 불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교인들이 더 이상 술을 팔아서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써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어졌으며 그러한 경향은 술을 넘어 더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더 많은 소유를 얻게 되는 것과 같이 소위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집사님이 사업에 실패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기는 했지만 그 후로 더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다른 교인들도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코 물질적 풍요나 성공이 하나님의 뜻을 보장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경각심을 항상 품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6. 두 개의 축
그렇다면 이제 가져야 할 관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속에 담긴 원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대부분 성경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설교와 성경공부는 전문적 지식을 갖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해석해주고, 큐티와 기도 같은 개인 신앙은 그렇게 얻게 된 원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 개인 신앙 훈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다른 그리스도인은 개인 신앙 훈련보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분명한 것은 정확한 앎 없는 훈련은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고, 훈련이 없는 앎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뜻대로 절제하는 훈련은 마차의 양 쪽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 쪽만으로는 건강한 신앙 생활을 지속해 나갈 수 없습니다.
7. 머믓거림
오늘 본문은 아합왕 시절 북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엘리야 선지자가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더 이상 머믓 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 라고 말합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믓 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부족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였기에 우왕좌왕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믓 거리고 살아가는 것은 실상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교통 신호등의 불빛을 보듯 명확히 분별할 수 있다면 어찌 우왕좌왕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하며, 그 뜻에 따라 삶을 해석하고,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점점 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분별하게 되며,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통해 증명되어질 것입니다.
EPILOGUE. 깨어 대비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싶다면 하나님에게 주파수를 맞추십시오. 그 주파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거듭남’ 곧 ‘중생’이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거룩하게 포장된 자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거짓 된 포장에 현혹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길 원한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 삶의 기준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온전히 계시 된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해 보여서 중요하게 오히려 간과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기본기가 바로 서 있지 못한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인생에 좋은 날이 계속될 때는 그 화려한 위용을 뽐내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인생의 어둠이 밀려오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빼앗길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라면 다시 희망의 찬미를 부를 수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남지 않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미는 겨울을 나기 위해 여름 내내 열심히 준비를 합니다. 인생의 어둠,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우리도 준비를 합시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증거나 날마다 분명하게 드러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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