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치관 1 ‘관계성’ (누가복음 10:25-27)
설교통예수님의 가치관 1 ‘관계성’ (누가복음 10:25-27)
1.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 담긴 하나님의 원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라는 사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모호함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원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살펴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모든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지닌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원리를 발견해 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런 과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을 통해 오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두 개의 축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영생’이란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영생은 단어가 지닌 의미로 보면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징적 현상이므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절) 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성경의 황금률이라고 불리우는 (눅 10:27, 개정)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 율법사와 예수님이 모두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 라며 앎의 실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또 다른 핵심 요소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 존재적 불안
A. 세상의 방법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관계성’ 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기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길거리에 홀로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선택해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더 많은 재산, 권력, 건강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더 심각한 관계 단절이 발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재화는 제한되어 있고 그것 가운데 누군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소유를 감소 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갈등을 유발하며 이는 관계 단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관계 단절의 심화는 궁극적으로 자기 소외를 초래함으로써 더 심각한 존재적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지닌 ‘존재적 불안’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은 자신이 지닌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성을 높이 쌓고, 더 많은 권력과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인간에게 가장 위험이 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호랑이나, 독사 혹은 전염병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 시사하는 점은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더욱 더 큰 불행과 죽음의 공포 속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B. 성경의 방법
성경에서 제시하는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며, 존재적 불안을 극복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율법사와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은 관계의 회복에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 동의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더하여 ‘사랑의 행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중요한 두 개의 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과 ‘사랑의 행함’입니다.
4. 왜 관계성인가?
왜 예수님은 ‘관계성의 회복’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명선언문 즉 (마 3:2, 개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4:17, 개정)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기록된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불교와 같이 깨달음을 얻은 개인에 의해 도달하는 개인적 차원의 목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성을 기초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 관계성이 회복되는 것은 기초 중에 기초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회개’는 관계성이 단절된 원인에 대한 ‘자각’과 회복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왜 사랑인가?
그럼 관계성을 회복하는 핵심 요소가 왜 ‘사랑’이어야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3:16, 개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자 하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성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4:8, 개정)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본질이 곧 ‘사랑’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계성을 회복하는데 핵심 요소가 ‘사랑’이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6. 어떤 사랑인가?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알겠는데 그럼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을 공포에 몰아 넣으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 싸이코패스나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어서 사랑하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려면 다음 두 개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 5:38-44, 개정)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18:21-22, 개정)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두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조건 없는 무제한적인 용서’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가르침에 대해 불편해 하고, 외면하고 싶어 합니다. 이 가르침에서 발견해야 할 두 가지 점이 있는데 첫째 ‘하나님 중심적 사고’와 자기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은 고사하고 이해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려고 시작할 때 이 가르침은 조금씩 그리고 강력하게 다가섭니다. 비록 나에겐 원수 이지만 하나님에겐 여전히 사랑하는 자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과 화해해 나감으로써 그와 더불어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명을 주신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가? 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상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 문제가 더 이상 나와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나와 하나님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에 이르는 ‘사고의 전환’(패러다임 쉬프트)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마땅히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물음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원수가 밉다는 점은 바뀌지 않으며 억지로 그를 사랑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원수를 정죄 하는 기도를 하기 보다 하나님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원수를 사랑할 힘이 없는 나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나의 분노를 더 사랑하는 이기적인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자신을 긍휼히 여기사 연약함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힘주시길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 사랑을 갖고 있습니까? 만약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그것은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열매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없다면 관계는 계속해서 단절될 것이며, 존재의 불안감은 더 심화될 것입니다.
7. 성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원리를 알았습니다. 사랑을 통해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행하여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지식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 2:3-5, 개정)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다툼, 허영을 멀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기라,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해주어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 가족 친구 교우 등, 우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지? 를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고, 참된 평안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회복의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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