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중요한 것 (마 6:24-34)
설교통더 중요한 것 (마태복음 6:24-34)
1. 한계와 선택
영화 전우치를 보면 ‘전우치’가 부적을 이용하여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을 여럿을 만들어 내어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만약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전우치를 특별한 능력을 지닌 ‘도사’로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양자역학의 슈뤠딩거의 고양이는 잠시 열외로 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물리적으로 동시간에 하나의 공간을 점유할 수 있을 뿐이며 여러 공간을 점유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람은 현재 이외의 시간을 살 수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현재일 뿐이며, 미래는 도래하지 않은 현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사람은 필연적으로 선택을 하며 존재합니다.
2. 선택의 기준과 책임
춘추전국시대에 오기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정치가였습니다. 76회에 걸친 대규모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요직에 등용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하여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하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찾아보지 않았고 결국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섬기는 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어 총사령관을 맡기로 했는데 자신의 아내가 적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자 아내를 목베어 죽인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성공과 가족이라는 선택의 순간에 그는 항상 성공을 선택했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화가를 꿈꾸던 미술학도였습니다. 그러나 미대 진학이 좌절되자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1차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의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아리안족의 이상 국가로서 독일을 재건하길 원하였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고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세계대전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만약 그가 미대진학에 실패했음에도 군대가 아니라 다시 미대 진학을 준비해서 성공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야곱은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나서 형이 받을 축복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는 결국 늙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대신 받았고 그로 인해 평생 가족을 떠나 고난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의 공격이 임박함을 알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결국 대제사장이 보낸 이들에게 체포되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류 구원을 향해 닫혀 있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바람을 선택하여 도망을 갔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한계가 있는 사람에게 선택은 필연입니다. 또한 선택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삶이 되는지가 결정되어짐을 알기에 누구나 자신의 선택이 더 나은 것이길 기대합니다.
3. 예수님의 제안
더 나은 결과에 이르는 선택을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서점에 가면 이것을 돕는 혹은 제안하는 다양한 정보들이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의 제안은 서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제안들 가운데 하나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안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방법이 아닌 태도를 언급하며, 이익이 아닌 절제를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안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불필요한 근심을 버리고 오늘을 살라’
‘불필요한 근심을 버리고 오늘을 살라’는 조언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조언의 차별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통장의 잔고를 의지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을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고, 경험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제안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 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다며 당신을 사랑할지라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고 당신을 사랑하신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어떤 문제 앞에서 고뇌의 뜬 밤을 지낼지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공급하실 것임을 믿고 불필요한 근심을 버리고 오늘을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하며 나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증거를 보이라’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안을 다시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믿으라’고 요청하십니다.
믿음은 검증 가능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뢰의 영역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을 때 부모에게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때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관계를 맺습니다. 심지어 그에 역행하는 증거가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믿다가 배신 당할지라도 믿지 않고 사는 아기에 비해 행복할 확률은 훨씬 더 높다는 수학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기본적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낯선 세상을 향해 나갈 힘을 얻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아기가 자신의 부모를 믿지 못한다면 그 아기의 삶은 이미 불행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길 기대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안을 수락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4. 예수님의 제안을 따르려면?
만약 당신이 예수의 제안을 따르기로 선택했다면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면 그것만으로 믿음이 생기는걸까요?
믿음이란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심함으로 인해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오랜시간 누적되는 경험의 영역에 해당됩니다. 낯선 사람의 제안을 믿기 힘들지만 오랜 벗의 제안은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낯선 사람보다 오랜 벗이 더 학력이 높아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함께 한 시간 동안 축적된 벗에 대한 경험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을 따라 살아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관 혹은 경험이나 지식에 위반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그에 따라 살아보려고 할 때 성공하든지 혹은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점차로 하나님이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하고서도 그의 말에 따라 살아보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리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녔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단지 믿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게 될 뿐입니다.
오랜만에 학창시절 졸업 앨범을 보면 반가운 얼굴도 있지만 도무지 같은 반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낯선 얼굴들도 있습니다. 편집이 잘못되어 그들이 여러분의 사진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나눈 경험이 적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하지만 경험하지 못함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추억의 앨범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예배드림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하나님에 대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의 제안을 따라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면 이제 또 하나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
춘추전국시대의 오기는 성공하기 위해 어머니와 부인을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최후는 대적자들에게 피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안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요 11:26, 개정)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자신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보는 경험이 여러분의 삶에 누적되어지길 원하니다. 그러한 누적을 통해 당신은 예수님의 약속이 진실된 것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믿는 척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믿음 안에서 오늘을 기쁨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있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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