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삶
설교통자족하는 삶 (빌 4:11-13)
(빌 4:11-13, 개정)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 자족을 모르는 자본주의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은 금융 자본주의(Finance capitalism)시대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 속성상 소비를 통해서만 존재가 가능한 사회체제이다. 소비가 멈추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사회구성들이 더 많이 소비하도록 유혹한다. 예를 들면 근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반인들에게 옷은 ‘필요에 의해 구매하는 것’이었다. 옷이 헤어지면 새로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산업 혁명으로 인해 옷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공장에 엄청나게 많은 재고의 옷이 쌓이게 되었다. 그 옷을 소비하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문화정책이 ‘유행’이다. 철마다 새로운 유행의 옷을 생산하고, 그 옷을 선보이는 패션쇼가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광고를 통해 새로운 유행의 옷이 선보였고 모델이 된 유명인들은 그 옷을 입고 공식적 자리에 나타났다. 일반인들은 새로운 유행에 맞는 옷을 사기 위해 옷가게로 몰려들게 되었다. 여전히 입을 수 있는 옷이지만 유행에 뒤쳐진 옷을 입은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둔감한 사람으로 매도되었고 새로운 유행을 따라 옷을 사는 사람은 센스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은 이전에는 살 필요가 없던 옷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열게 되었다. 이제 일반인에게 옷은 ‘필요에 의한 소비’ 가 아닌 ‘기호에 의한 소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지갑을 열도록 만든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닌 본질적 속성이자 치명적인 한계이다. 자존주의 사회에서 근검절약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공공의 적이다. 요즘엔 ‘욜로족’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유행을 만든다. ‘욜로족’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고, 그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즐김의 중심엔 당연히 ‘자기를 위한 소비’가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런 유혹에 순응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실상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얻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투자하며 살아가게된다.
2. 바울의 도발
오늘 본문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도발적인 내용이다.
(빌 4:11-13, 개정)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부자가 되보기도 하고, 가난해보기도 했음을 말하며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요인 곧 ‘소유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 곧 ‘인생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최신 유행의 옷을 입었다고 행복해지거나, 유행에 지난 옷을 입었다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동의할 수 있을까?
가난하여서 원하는 것을 사지 못하는 삶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나? 갈비를 먹는 친구 옆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으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나?
그럴 수 없다고 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바울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상주의자라서 그런가?
바울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것인가?’
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 사람은 햄버거를 사먹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 할 것이다. 만약 그가 햄버거를 사먹을 돈을 갖게 되었다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1970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MIT공대의 폴 새무엘슨 교수는 ‘행복지수’를 산출하는 공식을 발표했다.
그가 제안한 행복지수는 소비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다. 분모인 욕망보다 분자의 소비가 커질수록 행복지수는 늘어난다. 그런데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소비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즉 아무리 많은 것을 소비해도 욕망이 늘어나는 것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따라서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은 소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줄이는 방향이어야한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쇼핑은 패배가 예정된 게임이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새뮤엘슨 교수의 이론을 체득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으론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 역으로 아무리 적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으로는 행복을 빼앗길 수 없다.
3. 자신을 아는 것
소비로 행복에 이를 수 없으며 욕망의 절제를 통해서만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떻게 절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가 절제해야 할 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쇼핑 중독이 아닌 이상 멀쩡한 옷을 나두고 유행을 따르는 옷을 사는 사람은 ‘그 옷을 사는건 꼭 필요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며 구매를 한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려면 먼저 그것을 구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을 아는 것이 그것들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듯 하지만 실상은 잘 알지 못한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서 고민할 일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평소 즐겨 입던 옷과 다른 옷을 입고 너무 잘 어울려서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상은 어머니가 좋아하기 때문에 익숙해서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자는 자신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인정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신은 억울하고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평가는 축소, 왜곡되고 긍정적 평가는 강화된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은 정신적인 혼란 즉 정신질환에 걸리게 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잘 모르기 때문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술중독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임에도 술중독 자체를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이런류의 현상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4. 용기와 믿음
자신이 누군인지 정확히 알려면 자신의 실체를 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꾸며진, 변명된 그럴듯한 자신이 아니라 객관적인 눈으로 발가벗겨진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치부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니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니 자본주의의 유혹 앞에서 쉽게 굴복하고 만다.
백화점에 갈 때에는 티셔츠 하나 사러 갔던 사람이 백화점을 나올 땐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나오게 되고, 그러한 불필요한 소비를 메꾸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5. 바울의 비결과 권면
바울이 외부의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한 방법을 이렇게 소개한다.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의 비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왔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게 될 때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필요한 때에 공급해 주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삶을 지탱하는 안전판은 ‘소유’가 아닌 ‘하나님’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목표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필요한 것’이고, 합당하지 않는 것은 ‘필요없는 것’이 되었다.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의 깨달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자’임을 고백한 이들이다. 이들은 바울처럼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안전판은 ‘소유’인가? ‘하나님’인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로 자본주의의 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언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자본주의의 유혹에 무기력하게 굴복하며 살아가야하는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길 원한다. 그리고 바울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춰보길 권면한다.
'설교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중요한 것 (마 6:24-34) (0) | 2019.02.09 |
---|---|
비통과 불쌍히 여김의 간극(하방연대, 요 11:17-38, 롬 12:15-16) (0) | 2019.01.30 |
예수님의 가치관 1 ‘관계성’ (누가복음 10:25-27) (0) | 2017.07.26 |
하나님의 뜻 (왕상 18:21) (0) | 2017.07.21 |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마가복음 7:1-30) (0) | 2016.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