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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마가복음 7:1-30)

설교통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마가복음 7:1-30)

 

1. 차별

개와 조선인은 출입을 금한다일제강점기 어느 일본 식당 앞에 놓여 있던 안내문구입니다. 한국인은 누구든지 이 글을 읽고 분개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그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엄성을 무시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소개하는 것은 단지 일본인 식당 주인의 무례함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만연해 있는 차별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개와 조선인은 출입을 금한다라는 문장에서 조선인은 종종 흑인, 유태인, 집시, 동남아인, 장애인, 어린아이, 동성애자 등과 같은 단어로 대체되어 세계사의 언저리에서 빈번히 출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정당한 권리로 포장되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어떻게 이런 포장이 가능한 것입니까? 야누스의 얼굴과 같이 차별이 지닌 또 다른 얼굴의 이름은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차별을 당한다는 것은 위계의 질서가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차별하는 자는 그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차별받는 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합니다. 이렇게 얻어진 부당한 힘은 차별을 더욱 가속화, 공고화함으로써 정의로운 권력의 옷으로 미화되어집니다.

 

2. 예수와 수로보니게 여인

두로라는 이방 지역을 여행하던 예수는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은 헬라인으로 수로보니게 지역에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에게 도움을 간청하지만 번번이 거절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7:27)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예수의 이름을 가린 채 이 상황을 읽게 한다면 이방인을 차별하는 유대인, 힘없는 자를 경멸하는 비정한 권력자로 비난받아 마땅해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겐 크나큰 난감함을 느끼게 합니다.

 

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준 예수가 이처럼 사람의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하는 이야기를 한 것인가? 그에게 사랑의 대상은 유대인으로 한정된 것이었단 말인가? 와 같은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를 온 인류의 그리스도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해 고민하며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땅히 이런 질문을 동시에 던져야 합니다.

왜 누가는 이런 이야기를 굳이 성경에 기록한 것일까?’ 예수가 실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할지라도 편집과정에서 제거하거나 순화 시킬 순 없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본문을 좀 더 확장해서 읽어 보아야만 한다. 이 사건이 기록된 누가복음 7장은 소위 정결법 논쟁이라고 알려져 있는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비난하며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비난을 듣고 예수는 무리들에게 가르치시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 곧 잘못된 가치관이야 말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7:14-23)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게 만드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가 두로 지방에서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출신으로 이방 지역에 살며 그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린 가장 부정한 여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도록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럽다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그 여인에게는 바리새인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떤 수모도 감수하겠다는 자기희생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에 의해 번번이 거절당하고, 인격적 모멸을 받는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3. 관계

누가는 외적으로 정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를 정죄하기 위해 모여든 바리새인들과 비록 외적으로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절제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누가 더 정결한 자인가?’ 묻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반면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심을 보여줌으로써 진정으로 정결한 자는 수로보니게 여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결법은 본질적으로 부정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주어진 법으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관계를 단절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정결법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부정하다 비난받음에도 불구하고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통해 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려 함으로써 정결법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 타인을 차별함으로써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7:15-16)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려기 위한 목적을 갖고 본문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정결법을 통해 차별함으로써 관계를 단절 시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철저한 자기 절제로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화의 대비를 통해 정결법은 결코 차별을 통한 권력 획득의 수단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병든 관계를 회복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예수가 전한 복음의 본질이고,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가르침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사명

개와 조선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멸감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들의 심연에 똬리 품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며 조선인의 자리에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이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곁에 예수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들이 돌을 맞는 자리에서 함께 돌을 맞아야 하며, 그들에게 던져지는 온갖 비난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은 끊임없이 그러한 모든 차별적 시도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 안에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유혹들에 대해 단호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별을 통한 관계 단절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본질은 연합이요, 평등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과연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과연 안녕한 것입니까?

 

교회의 직분자들은 가운데는 자신들의 직분을 정결법처럼 사용하여 다른 직분자를 차별하는 이가 있으며, 교회를 오래 다닌 이는 자신의 경험을 정결법처럼 사용하여 새로 나온 이들을 차별하는 이들이 있고, 교회를 다니는 이는 자신이 받은 죄사함의 은혜를 정결법처럼 사용하여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차별하며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분자로 세운 것은, 더 먼저 교회에 나와 예배하게 하신 것은, 죄사함의 은혜를 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차별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많은 이들과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난하기보다 혹시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졌던 문제점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먼저 물어야 하며 이 물음 앞에 날마다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차별이 아닌 연대를 위해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껍데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 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