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요 17:11-23)
설교통예수님처럼 (요한복음 17:11-23)
1. 바이럴 마케팅
기업에서 물건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팔 때 사용하는 방법을 ‘마케팅’ 이라고 합니다. 마케팅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지만 최근 들어 주목 받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이럴(입소문) 마케팅’입니다. 기존에는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기업에서 준비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소비자에게 전달하던 것에 비해서 ‘바이럴 마케팅’은 소비자의 평가를 통해서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홍보하는 방식입니다. 물건을 실제로 사용해본 사람들의 평가에 근거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신뢰도가 다른 방식에 비해 훨씬 더 높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홍보의 전달 속도가 느리고 파급되는 범위가 좁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존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온라인의 특성상 직접 보고 구매할 수 없기에 먼저 구매한 사람들의 평가가 구매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바이럴 마케팅은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되었고 기업들이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 블로거, 유튜브 등을 통해서 적극적인 ‘바이럴 마케팅’에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마케팅 방법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된 역사적 사례를 꼽는다면 ‘기독교의 선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비가시적인 존재(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를 믿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시적 실상을 지닌 다른 종교에 비해서 선교를 하는데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을 믿는 히브리인들을 조롱하며 만질 수 있는 실상이 있는 자신들의 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제의에서 보이는 믿음과 달리 삶이 위기에 직면하거나 이방인들의 조롱을 당할 때면 하나님도 어떤 형상으로든 눈에 보여지길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아무 소식이 없고 백성들은 동요를 하자 아론은 황금으로 송아지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반역을 하여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의 경우에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섬기게 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하나님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것으로든 자신을 형상화 할 수 없도록 엄격히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면 하나님보다 그 형상 자체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왜곡될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는 것은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큰 장애물이 되어 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론의 황금송아지처럼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우상 역할을 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의 풍요’가 하나님의 형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이며, 소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떠나심의 증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주장이 옳다면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현대 사회는 상속으로 물려 받는 재산이 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재산을 앞질렀고 그 격차는 점차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과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위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의 정의가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근본적 믿음에 의구심을 갖도록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더 많이 소유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자기 노력으로 인해 소유의 격차가 벌어진 경우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유무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근본적 믿음에 회의를 갖게 합니다. 부유한 자녀와 가난한 자녀가 있을 경우 부유하기 때문에 부모가 사랑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부모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는 부유함이라는 조건이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유가 많고 적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소유가 늘어나고, 삶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떠나신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의 풍요’ 라는 것으로 우상화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소유가 정당한 노력의 대가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구조적 복잡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재산을 부당하게 갈취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물품을 제조 유통함으로써 이익을 취하고, 불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하는 일들은 현대 사회에서 결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소유의 풍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증거라면 불법적, 비윤리적 방법을 사용해서 소유를 늘린 이들의 편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종교윤리적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였다는 것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 비슷한 관점에서 ‘기적’이 황금송아지처럼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우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나타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기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인정한다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지라도 거기에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이 전제된 것입니다. 기적은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 예외적 현상이지만 그것이 자연의 보편적 질서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심에 있어서 의도된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차별적 증거가 아닙니다. 기적의 유무에 따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유무를 가리는 것은 기적이라는 예외적 현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또다른 형태의 우상입니다.
2. 비가시적 존재를 증거하기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전할 수 있습니까?
(요 1:1, 현대인)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눈에 보이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에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과 지식으로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공간의 한계성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사역하시던 시대의 사람들 조차도 예수그리스도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는 여전히 피상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세종대왕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남겨진 문헌을 통해 지식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적으로 느끼기 힘든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한계가 있는 것을 아셨기에 두 가지를 준비하셨는데 하나는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공동체이고 또 하나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예가 ‘바울’과 ‘아나니아’입니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 가던 바울이 빛 가운데 임한 예수님을 만남으로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이 회심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은 ‘변화의 계기’ 이지 ‘변화의 순간’은 아닙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변화된 것은 그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며, 사랑으로 치유한 ‘아나니아’를 통해서입니다. (베드로를 속이다가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아나니아가 아님) 그를 통해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랑과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한 사람들이 ‘제자들(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모인 ‘신앙공동체’가 ‘초대교회’ 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문이 날로 퍼져 나감으로 그 모이는 수가 늘어가게 되었고 복음은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바이럴 마케팅’의 방법과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선교의 위기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바이럴 마케팅’ 의 위력이 감소하는 경향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판매자들이 유명 블로거나 트위터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글을 올리도록 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글을 삭제하고, 유리한 글은 알바를 동원하여 퍼 나르는 형식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이 판매자의 입김이 들어간 것으로 보여지는 사용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구매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물건 자체는 변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그 물건을 대하는 반응이 극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기독교 선교의 정체 혹은 퇴보 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전한 복음이 지금 우리가 가진 복음보다 더 뛰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복음이 많은 사람에게 적대적인 대상으로 간주되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선교는 열심히 했는데 정작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자신이 전하는대로 살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데 비그리스도인들처럼 계산적이고, 비도덕적인 경우가 너무나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네거티브한 신앙윤리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 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 지옥에 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버려서 형식적으로 의례적인 신앙에 메몰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답게 신앙생활도 ‘효율적’으로 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가족에게 모범이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 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가족을 구원하고, 주변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교회가 건강한 신앙공동체로 자리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개인은 개인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공동체는 공동체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지켜내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장 첫 단계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부터 ‘인정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인정 받는 삶’ 이란 바리새인들처럼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신앙 태도’를 가지라는 것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고, 그분의 삶을 닮아가려는 진지한 자기성찰의 노력 가운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예수의 가르침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하신 중보기도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선교’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7:14, 개정)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요 17:14, 현대인)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이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 εγω δεδωκα αυτοις τον λογον σου και ο κοσμος εμισησεν αυτους οτι ουκ εισιν εκ του κοσμου καθως εγω ουκ ειμι εκ του κοσμου
개역개정판이나 현대인의 성경으로는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 것인지? 제자들이 예수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원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 부분이 명확해지는데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게 읽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미워한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심은 제자들은(그리스도인)단지 예수의 가르침을 아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예수님이 증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한다’ 는 것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음으로 고난을 자청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닮아 살아감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러한 삶의 태도 때문에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신앙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겪는 일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5. 갈등을 넘어서
이것은 현실적으로 큰 갈등을 갖게 만듭니다. 특히 오늘 한국교회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복받고 성공하는 것’과 동일시하여 가르치는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쉬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왜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7:13, 현대인)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기쁨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기르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 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이며, 현상을 넘어 본질에 관한 것이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써 그 분을 증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확실히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을 갖게 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썩을 것에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포기하거나,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기쁨은 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몸은 예배를 드리나 영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예배는 그저 지루하고 형식적엔 의식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닮음으로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가고 그 분을 전파하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두려워함으로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하여 아무런 확신 없는 신앙인이 되는 쪽입니까?
여러분이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여러분 스스로가 아니라 여러분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완전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다 인정받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의 삶이라는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의 가정이라는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의 신앙공동체라는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터전이라는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한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진리로 거룩한 삶 곧 사랑으로 하나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과 교우와 이웃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와 신앙공동체가 그러한 신앙인과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굳게 서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요 17:18-21, 현대인)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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