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봄!
생각통올 해는 봄이 참 더디 오나 싶었는데...오늘 성큼 봄이 찾아왔네요..
드디어 봄! 반드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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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5-13, 개정)
예전 버스 정류장에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구절이 적힌 곳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구하면 주신다니, 참으로 멋진 약속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구하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을까요?
가르침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얻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돌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극단적으로 적용하면, 빈곤은 빈곤한 사람의 책임이고, 범죄 피해는 피해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을 수도 있지만, 그가 처한 환경에서도 찾아야 합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문제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이 사회학을 통해 이미 여러 번 입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수동적인 태도가 아닌 능동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언급된 주기도문에서 강조된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요?
주기도문은 우리가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에 기반한 용서와 연대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주기도문에서 그려지는 인간상은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것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은혜를 구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통해 타인을 적극적으로 용서하는 능동적 태도를 갖춰야 하는 존재입니다. 본질적 한계로 인해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된 존재인 동시에, 받은 은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응답(용서, 연대)하는 존재가 주기도문에서 제시하는 인간상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요청하는 태도와 주기도문에서 요청하는 것은 상반되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구하라'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를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된 존재'에 대한 자각이 담긴 행위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역시 주기도문에서 요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자각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구할 필요를 느낄 수 없습니다. '구하지 않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음이며 동시에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존중하시기에 임의로 그 삶에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구하지 않는 자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는 가르침은 찾지 못한 것, 얻지 못한 것의 책임을 사람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본질적 한계를 인정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과 같이 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도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주기도문 중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3)에 대한 긴 주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구하라'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기복적 수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 자기 소원을 하나님에게 구하면 성취된다.'라는 식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구하는 것은 이방인(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 구하지 않는 자, 마 6:31-33)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를 아시고 함께 해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구할 때 자신의 필요와 욕망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마 6:33)합니다. 주기도문의 첫 구절이 '나라가 임하시오며'(눅 11:2)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은 '성령'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눅 11:13)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 현장에서 '구하면 주신다'라는 구절을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처럼 해석해서 설교하고 떼를 잘 부리는 것이 훌륭한 신앙생활인 것처럼 가르치기조차 합니다.
말씀은 그렇게 저급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주기도문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면 전반부에서 언급한 의문과 후반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주기도문과 함께해야 참된 의미가 읽힌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참고>
(마 6:31-33, 개정)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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