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다듬는 신앙' (시몬과 죄 많은 여인, 눅 7:36-50)
설교통'사랑을 다듬는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 가운데서 chapter2 부분만 발췌.
1. 내용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방문을 하셨을 때 죄많은 여인(창녀일 가능성이 높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시몬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진짜 선지자가 맞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생각을 알아차리시고는 제자와 대화를 통해 ‘더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47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시몬 보다 죄인임을 자각한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주신 후 예수님은 그녀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변에서 이 모습을 본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에게 죄를 사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논란이 생겼습니다. 죄 사할 권한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논란
예수님의 가르침에 두 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첫째 더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하는가?
둘째 완벽하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시몬보다 욕망에 따라 산 여인이 더 칭찬을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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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번째 질문
두번째 질문을 생각해봅시다.
시몬이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할지라도 인간이라는 존재적 한계로 인해 완벽한 삶을 살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족적을 비교하면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시몬보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온 죄많은 여인을 칭찬하는 것은 상식적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많은 여인을 더 칭찬하셨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평가의 차이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 보다 예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로 인한 것입니다.
평소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보다 예수님을 대하는 신앙적 태도만으로 더 높은 평가받는 다면 과연 이것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관점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보편적 정의'의 개념에서 볼 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신앙과 보편적 정의가 대립한다면 그 신앙은 사이비입니다. 신앙은 보편적 정의를 포함하며 넘어서는 것이지 대립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시몬보다 여인을 칭찬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평가가 시몬이 살아온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에 있서 여인이 더 크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시몬에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몬과 여인이 갖고 있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는 하나님이 부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나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나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싶어하실 뿐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각 개인의 주체적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두 사람이 보인 사랑의 차이는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시몬보다 죄많은 여인이 지닌 사랑이 더 크다고 칭찬하신 것은 누가 더 올바른 삶을 살았는가? 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누가 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사랑하는가? 는 '받은 은혜의 크기'가 아니라 '자신의 실체에 대한 겸허한 성찰'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실존적 한계에 대한 자각과 극복하려는 간절함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죄많은 여인이 더 많이 사랑한 것은 시몬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한계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함이 시몬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실존적 자각과 극복의 간절함이 크면 작은 은혜를 받고도 더 많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큰 은혜를 받고도 더 적게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더 올바른 삶을 살아온 시몬보다 죄많은 여인의 사랑을 칭찬하신 것을 정의의 문제로 접근하는것은 무의미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향한 태도의 차이 때문에 죄많은 여인이 더 칭찬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이유는 자기 극복을 향한 여인의 간절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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