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예교회 "더불어 성장하는 삶 공동체"

130224 아름다운교회 설교 "조성과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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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과 조정 (18:18-23) / 2월 24일 아름다운교회에서 설교한 원고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쓰신 신영복 교수님의 책 처음처럼에는 가장 먼 여행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먼저 그 글을 소개해 드리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자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글에 공감하십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 글에 여행 중 발로 향하는 가장 먼 여행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분은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을 하실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머리에서 발로 가는 여행을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현재 머믈러 있는 곳이 어디에 있던지 이 말씀을 마칠 때에는 우리 모두가 발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해 지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1. 정으로 아는 것

러분 떡볶기를 만들 줄 아십니까?

제가 떡볶기를 좋아해서 집에서 만들어 먹으려고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위해 떡볶기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법을 유심히 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자신있게 떡볶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뭔가 부족합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아는 것을 실제로 만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진정으로 아는 것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머리에서 아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볼 때 비록 실패했던지 혹은 성공했던지 간에 무언가에 대해 안다고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 아는 것과 진정으로 아는 것의 차이를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장사가 잘 되는 떡볶기 집에 가서 먹으며 별 것도 아닌 걸로 돈 잘버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드라마의 배우를 보며 저 정도 나도 하겠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하찮은 일이라도 머리가 아닌 체험의 과정으로 나아가면 세상 어떤 일도 만만한 일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집에가서 아무리 만들어 봐도 그 떡볶기집의 맛이 나지 않을 때, 비록 단역이라도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해 봤을 때 맛있는 떡볶기집에 가면 경외심을 갖고 먹게 되고, 발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은 안스러움이 생깁니다.

 

저는 이런 체험의 과정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직접 사람의 연약함과 아픔을 직접 체험하여 태어난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버러지라고 손가락질 받던 창녀의 친구가 되어 그녀의 아픔을 나누셨고,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던 세리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시며 그의 친구가 되셨으며, 그 스스로 견딜 수 없는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면서도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철학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철학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그 가르침을 삶으로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배움과 동시에 발로 떠나는 여행을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때로는 자기의 연약함에 절망하고, 때로는 상황에 절망할지라도 이 여행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2. 발로가는 여행의 본질

그렇다면 우리가 발로가는 여행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무작정 걸어간다고 해서 다 발로 가는 여행은 아닙니다. 걷기는 하지만 자기 신념을 위해, 걷기는 하지만 남의 이목 때문에, 걷기는 하지만 책망이 두려워서 하는 여행이 있다면 그 걸음은 무익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발로가는 여행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행이어야 합니다.

(4:18-19, 개정)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 40일간 경건의 훈련을 마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당에 들러 이 구절을 낭독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발로의 여행이란 바로 이 말씀을 삶에서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이 말씀 속에는 많은 교인들이 바라는 세상에서 자녀의 성공, 인생의 부와 명예와 같은 것들도 모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나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세상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건널 수도 없는 차이이며 바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필요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발로의 여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떤 관원이 와서 예수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오늘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길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관원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심히 근심하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좀 야박한 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처럼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만큼 했으면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돌려보내주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그를 근심하게 만드셨습니다. 왜 일까요?

 

저는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앞에서 말씀드린 사람의 필요하나님의 필요의 관점에서 다시 보길 원합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은 누구의 필요입니까? 관원의 필요입니다. 가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누구의 필요입니까? 하나님의 필요입니다. 관원은 계명을 잘 준수한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그 경건이 누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경건한 사람이야라는 자기만족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율법의 일점 일획도 어기지 않았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필요를 향하는 여행을 할 수 없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그에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누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인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길 원합니다.

 

3. 조성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실 때에는 그 교회마다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하게 하시고, 어떤 교회는 베풀고 나누게 하시며, 어떤 교회는 정의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움을 받았습니다. 각 교회들은 연합하여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감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함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각 교회마다 주신 뜻을 이루어가게 하시고자 성도들을 부르시고 은사를 주시어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은 우연히 주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하심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을 통해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은 아름다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으십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을 부르셨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교회도 우연히 세워지거나, 어떤 성도도 우연히 부름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요, 교회를 몸이요, 성도를 지체라고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비전과 성도의 은사는 서로 따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 한 울타리 안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자신을 불러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니 성도들도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어찌 사용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눈 먼자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눈 먼 공동체와 눈 먼 성도로 남아있지 않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 그것을 알도록 삶의 환경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것을 바로 조성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신앙공동체와 여러분 개인을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쁨을 경험하게 하심은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어보러 온 관원에게 왜 야박하게 심한 근심을 안겨 주신 것입니까? 그가 교만해 보여서 기분이 나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필요에 순종함으로써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의 수준에 올라서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보다 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에 만족하고 머믈러 있지 않길 원하십니다. 끊임없이 말씀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발로의 여행을 하도록 삶의 환경을 조성하고 계십니다.

 

4. 조정하는 삶

이제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러한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에 머믈렀던 신앙에서 하나님의 필요를 이루기 위한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교회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는 의지적 결단을 조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교회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나의 만족을 내려놓는 것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교회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발로의 여행입니다.

5. 성령 충만함

그런데 이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머리로 이해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발로의 여행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여행을 믿음 좋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셔서 나로서는 이 여행을 시작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신 아신 예수님이 연약한 우리가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8-19, 개정)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서 주목해서 보실 것은 바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구절입니다.

또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1:8, 개정)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증인이 되기 위해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아무리 연약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곧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발로의 여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걸어서 여기서 부산을 가라면 어떤 사람은 가능하고 어떤 사람은 힘들겠지만 자동차를 타고 가라면 못갈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려니 실패하고, 내 맘대로 하려니 길을 잃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조성하신 대로 여러분의 삶을 조정하십시오.

바로 그 과정이 성화입니다. 지금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한 단계 더 높이 올라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으십시오.

 

예수님은 부자 관원에게 그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도 그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부자 관원처럼 심히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심히 고민하였던 그 부자 관원은 훗날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광기가 정점에 이르던 바로 그날 홀로 예수님을 체포한 것이 불법임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외친 그 사람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는 심히 고민하며 돌아갔지만 그 고민 끝에 사람이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이 그러한 성장에 이르도록 아니 그 이상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는 두려움도, 근심과 염려도 더 이상 여러분에게 주신 기쁨과 담대함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날이 속히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