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09 조성과 조정(눅 18: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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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18-23)
(이번 주 요약본은 좀 깁니다...^^; 설교는 좀 쉽게 하겠지만...원고 자체가 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부득이하게 요약본이 좀 길어졌습니다. 너무 부담되시면 '요약 of 요약'을 보시고 색이 칠해진 부분만 읽으셔도 됩니다만..가능하면 모두 읽으시는게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요약 of 요약: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조성’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위해 자신의 욕구를 ‘조정’ 하게 될 때 신앙은 ‘성장’하게 되며, 성장한 분량만큼 하나님에게 쓰임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을 사는 것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나누는 이유는 ‘뜻을 아는 것은 결국 행하기 위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알기위한 열심을 행함의 땀방울로 연결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본능적 욕구가 불일치하는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차원에서 이러한 불일치는 사소해 보이지만 행함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이것은 엄청난 괴리처럼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이전까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포기하거나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진정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행동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측정가능한 행동의 변화를 통해 실체를 검증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란말이 요리에 대해 안다는 것은 실제로 그가 계란말이를 요리할 수 있음으로 검증되어지며, 영어 단어를 다 외었다고 하는 학생은 시험을 보는 동안 외운 것을 글로 적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외운 것을 검증받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어떤 학생이 주어진 단어를 다 외웠다고 하면서도 정작 시험지에 아무 것도 적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은 ‘양자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알면 반드시 행함으로 그것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또 생각할 것은 행함의 영역에서는 ‘성장’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막 걸음마를 배울 때 처음에는 잘 서있지도 못하다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한 발자국씩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뛰어다녀서 붙잡으러 다니기 힘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는 것을 행하는 과정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자기 멋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알고 나서는 그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게 될 때 처음부터 능숙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간에 해왔던 삶의 습성들이 남아 있기에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따라가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매우 힘든 것은 아기가 걸음을 배우는 것보다 성인이 걸음을 교정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구지 그렇게 교정하지 않아도 살아 왔고 또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교정의 고통은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수준에 만족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어떤 사람에게 어려운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은 그가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길 위한 것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심은 단순한 지적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여러분을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는 것을 행함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만약 여러분이 행함으로 연결시키는 믿음의 길을 걷길 원한다면 ‘성장’이란 개념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성장은 하나님의 엄격한 훈련과 인도하심 아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성’입니다.
조성이란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삶의 각 단계에 예비하신 사건과 말씀을 통해 계획하신 목표를 향해 성장 시키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모든 사건들은 바로 이러한 조성의 과정이며 그 과정이 하나님의 훈련이심을 깨닫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의 최종 목적은 ‘예수님처럼 되는 삶’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기 까지 결코 멈추거나, 교만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하며 이것을 위해 자신을 본성을 돌아보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 순종의 삶을 택하는 것은 필수적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해 문의하러온 한 부자관리와의 대화가 적혀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영생을 얻기에 충분해 보이는 삶을 그는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리는 큰 부자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설교에서 이 부자관원은 교만한 사람으로 평가 절하되곤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님의 요구사항은 지나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가 한 이야기가 맞는다면 그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함으로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른 이보다 더 경건한 삶을 살았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면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생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유심히 보면 예수님은 그가 실제로 율법을 잘 준수하였는지 검증하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자신의 욕심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느냐?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비록 그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현재 그의 영적 상태는 건강하지 못한 것이며 이러한 상태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보다 더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함께 동행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비례하여 항상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적은 믿음을 가진 자는 작은 일 앞에서 갈등하고, 큰 믿음을 가진 자는 큰 일 앞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을 극복하고 순종에 이를 때 그의 신앙은 ‘성장’하며 좀 더 큰 그릇이 되며 좀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의 상황마다 현재 자신의 상태에 안주하며 행함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강력한 유혹에 항상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부자관원과 같이 자신의 믿음에 흡족해 하려는 영적 나태함에 빠지며, 타인의 신앙을 비평하려는 영적 교만함에 물들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영적 상태에 놓여 있을지라도 지금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본문에서 모든 물질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 부자관원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수준에 따라 갈등의 상황을 조성하십니다. 이제 막 면허시험원서를 등록한 사람에게 대형트럭을 몰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이상적 수준에 이르도록 수준에 맞게 점진적으로 우리의 신앙과정을 조성해 나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길을 잃지 않고 올곧이 가야 할 길을 감당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태도가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훈련의 본질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훈련 전반에 걸쳐 주어져 있는 기본과제인 것입니다.
헬스클럽에 가서 몸을 키우고자 할 때 헬스트레이너는 처음에는 그의 현 상태에 맞는 운동을 시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에게 적합하도록 힘들지만 해낼 수 있는 정도로 운동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마구잡이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트레이너의 지도에 따라 운동을 하면 멋진 몸매와 근육이 강화되듯이 하나님의 ‘조성’하심에 여러분의 삶을 ‘조정’하면 여러분은 성숙한 믿음으로 강화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수준의 신앙생활만 반복하거나,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더 이상 영적성숙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에 열정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믿음이 더 성장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현 상태보다 조금씩 더 힘겨운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힘듦은 무익한 고통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는 위대한 구원의 밀알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믿음의 갈등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조정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잡혀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이르도록 조정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직면한 갈등의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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