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신앙
저장소/이미지맵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신앙(막 9:33-37)
1. 제자들의 논쟁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나눌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쟁론을 한 주제에 대해 예수님이 묻고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크냐?’의 문제로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여기서 ‘크다’는 것은 단지 외형이 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사람’ 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영문 "the Greatest") 즉 그들은 ‘누가 자신들 가운데서 리더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제자는 자신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따라 다녔기 때문에 자신이 리더의 자격이 있다고 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리더의 자격이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제자들도 각 자 자신들이 리더여야 하는 이유를 말하며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2. 승자에 대한 갈망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무한 경쟁시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경쟁에서 패한 자는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으며,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려하고 하고, 일단 승자가 되면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도록 ‘기득권’이라는 자신만의 철옹성을 쌓아갑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납니다. 그래서 승자가 되기 위해 비성경적인 일을 가장 성경적인 일처럼 꾸미는 일들도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승자가 된 이들이 리더가 되어 자신만의 철옹성을 쌓아갑니다.
교회 안에 많은 병폐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잘못된 경쟁의식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하시며 남긴 달란트의 액수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동일한 칭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공동체의 근간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쟁은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지만, 협력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모인 신앙 공동체에서 ‘어디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 이라는 가치관은 ‘죄’입니다. 아무리 먼저 서울에 도착을 했을지라도 그 과정이 정의롭고, 진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자기의 욕심과 사단의 유혹을 따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교인들이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문화에 물들어 버렸고, 그로인해 ‘성경적이지 않은 경쟁’1 1 종말론을 말하는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왜 책망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제시한 날짜가 틀렸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종말이라는 결과에 집착하여 현재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은 오늘 종말이 올지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의 심각성에 무감각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 로 논쟁을 벌인 것은 그들이 지나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할 공동체의 일원 2 2 (롬 8:28,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라는 부름 받은 본질을 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진정으로 큰 자에 대한 가르침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오셔서 그들이 왜 논쟁을 벌였는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9:35, 현대인) 『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
여러분은 이 가르치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뜸이 되고 싶으면 끝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는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끝과 종이 되는 것과 으뜸이 되는 것이 어찌 같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마음의 자세’로 받아들이면 이해는 쉬워집니다. 으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의 끝과 종이 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끝과 종이 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고등학교 때 체육시간이면 모든 반 학생들이 항상 운동장을 30바퀴를 뛰어야 했습니다. 키가 큰 학생들은 앞에 작은 학생들은 뒤에 서게 한 후 오와 열을 맞춰 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키 큰 학생의 한 걸음은 작은 학생들의 두 걸음과 거의 맞먹었기에 얼마 가지 않아서 앞과 뒤가 완전히 분리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두를 다시 불러들여서 몹시 화를 내시며 다시 대열이 깨지면 단체 기합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뛰는 키 큰 학생들은 자신의 보폭보다 반은 줄여서 뛰기 시작했고, 작은 학생들은 더 빠르게 움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나니 전혀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고 빠르게 30바퀴를 뛰고 충분한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뛰는 키 큰 학생들이 맨 뒤에 있는 작은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래서 그들의 보폭에 맞추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의 끝과 종이 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리더가 되고자 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실패한 리더가 되고 맙니다. 성공한 리더일수록 더 많은 공동체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당연하며 하물며 끝과 종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다면 그가 성공한 리더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인인 신앙공동체는 누가 더 기도를 잘하는가? 더 신앙이 좋은가? 더 헌금을 많이 하는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나에게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주셨다면 그것을 나보다 못한 이들을 배려하고 도와주어 낙오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날마다 구원을 맛보고, 영생에 이르도록 협력하는 곳입니다.
저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4. 큰 자가 되기 위한 자세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보다 분명히 알려 주시기 위해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막 9:37, 현대인)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아이는 신체적으로든지, 정신적으로든지, 영적으로든지 다른 제자들과 견줄 수 없이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신앙공동체가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나 보다 부족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려는 마음이 있어야만합니다. 제자들이 그 어린아이와 경쟁을 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겠습니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경쟁이 아니라 그 연약한 아이를 가슴으로 안아주는 것이며, 사랑으로 돌봐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목사요, 사모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일질도 그들도 사람이기에 불완전하고 미숙한 점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그러한 것이 보일 때, 마음에 느껴질 때 여러분이 해야 할 기도의 주제는 ‘경쟁적 비판’이 아니라 ‘비판적 협력’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말주변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협력하라고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믿음의 왕이었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도록 나단을 협력자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바로 이러한 마음을 품고 신앙공동체를 꾸려 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상대의 약점을 나의 장점으로 도와주고, 나의 약점이 상대의 장점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곳에 분열과 다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고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서로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동산을 가꾸어 가라고 세움을 받은 그들이 협력이 아닌 경쟁의 관계로 변화된 바로 그것이 인류 비극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은 그들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살인에 이르는 경쟁을 하게 됨으로써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 책망 받아 마땅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 그래서 그들이 성숙한 존재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신앙’입니다.
왜 한국 교회가 병들었습니까?
경쟁으로 인해 협력을 잃어버린 것이 병의 원인이며, 이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으로 서로 간에 협력함으로써 성숙한 인격을 갖춘 신앙인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 옵니다. 죄인이란 약점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점을 고백하고 치유 받고 넘어서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어 버린다면 누가 교회에서 자신의 약점을 치유 받을 것이며, 어떤 죄인이 교회를 찾으려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세리의 죄를 아셨습니다. 창녀의 더러운 삶도 상세히 아셨습니다. 도둑과 게으른 자들의 허물도 모두 아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세상의 경쟁에 낙오한 이들의 허물을 감싸 안으시며 서로가 사랑으로 협력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초대교회는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자각한 자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받고, 도움을 나누며 협력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런 신앙 공동체를 바로 이 곳에, 바로 우리를 통해 세워가길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5. 성령의 도우심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보다 앞서고 싶은 욕심, 좋은 결과를 위해 과정 따윈 무시하고 싶은 욕심, 다른 사람이 지닌 연약한 모습을 용납하기 싫은 욕심이 우리 안에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순절날 함께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그들은 이러한 욕심을 뛰어넘어 예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합시다. 우리 안에 더럽고 연약한 것들을 태워 경쟁이 아닌 협력의 공동체를 가꾸어갈 수 있도록 우리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며 우리 모임은 진정으로 ‘가장 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꿈을 위해 우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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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말론을 말하는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왜 책망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제시한 날짜가 틀렸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종말이라는 결과에 집착하여 현재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은 오늘 종말이 올지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2 (롬 8:28,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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