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예교회 "더불어 성장하는 삶 공동체"

130428 오실 이 (마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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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이 (11:2-11)




1. 세례요한의 물음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기 전에 유대 땅에는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사역이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당대에 부패했던 종교인들과 달리 광야에서 야인의 생활을 하며 철저한 금욕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곧 이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헤롯왕의 잘못을 비판하다 체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을 빨리 죽이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활약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자신이 오시리라 예언한 메시야가 맞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2. 메시야로 인정 받지 못한 예수님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갔을 때 군대귀신이 예수님을 한 번에 알아차린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입니다.

 

여기서 좀 더 확장해서 생각을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한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들을 더하여 생각하면 이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 예수님의 실체가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는가?” 만약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이 더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들어났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군병들에게 잡혀가 그토록 조롱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명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실체를 명확히 이해하게 된 것은 부활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 였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요?

또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은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셨다는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고도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행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기록되어 있듯이 이적을 체험한 이들 중 상당수는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의 경우와 같이 너무나 공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이적에 대해 비공개를 요구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던 적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 받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환호하고 그 분을 랍비요 예언자요 선지자라고 불렀지만 정작 메시야로 인정하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그리스도 곧 메시야로 인정했다면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토록 큰 칭찬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이적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3. 심판의 메시야 vs 복음의 메시야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갖힌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에게 오실 이메시야가 당신입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소문으로 유추해볼 때 메시야일 가능성이 많기는 하지만 확신하기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투의 질문입니다.

 

그럼 무엇이 빠진 것일까요? 당대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메시야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는 자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필연적으로 유대를 압제하고 있는 이방족속인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러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며 회개의 세례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분명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메시야의 모습은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로써의 모습이 훨씬 더 강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였기에 제자들을 보내 그 점을 확인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심판하는 메시야의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온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1:4-5, 현대인)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고 하라.

 

이 대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는 심판의 메시야가 아니라 복음의 메시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하심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단지 유대의 해방을 위해서 오는 자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대답을 통해 세례요한이 메시야에 대한 기본 이해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6, 현대인) 그리고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일러 주어라.'

 

만약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메시야에 대한 개념을 수정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그의 생각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 계시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례요한이 여전히 기존의 메시야관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자가 나은 자들 가운데서 가장 큰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자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11)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수정의 요구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능력에 놀라워 하면서도 세례요한이 가졌던 것과 같은 의문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나서도 기존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걸었던 희망을 포기하고 적대자로 돌변한 것입니다.

 

4. 잘못된 관점의 결과와 수정의 필요성

그럼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데 왜 삶 속에 고난이 계속되느냐는 불신에 찬 질문을 종종 받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신을 경배하는 부질없는 짓을 하거나, 무능력한 신을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의 결과가 맺히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을 합니다.관점이 잘못되면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4)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듣고 본 것이라는 것은 깨달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기존에 생각했던 메시야의 모습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님을 직접 만남으로 깨닫게 된 메시야의 모습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자신의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과 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메시야에 대해 기존의 관점으로 볼 때 세례요한 조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자신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고자 한다면 먼저 해야 할 것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삶의 실천 속에서 주어집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우리 삶에 신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신지를 비로서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고장난 휴대폰을 뜯어보면 여러 부품들이 플라스틱 기판위에 오밀조밀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인이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휴대폰을 설계한 사람은 각 부품의 기능과 문제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음으로 인해 수리가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고장난 휴대폰을 고치기 위해 휴대폰 설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장난 우리의 삶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주어진 모든 일들이 지닌 참된 의미를 바르게 알게되고,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지? 비로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 나감으로써 우리의 삶은 세상이 주는 값싼 행복과 본질적으로 다른 참된 행복을 향해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훈련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해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긴 하지만 그것이 뜬구름 잡는 식의 요행수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그것을 수정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저는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여러분이 잊지 않길 바랍니다. 왜 나에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가? 하며 부질없는 한탄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먼저 성찰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인 문제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 분명히 보이게 될 것이며 그 때 자신의 삶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가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