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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02 철든 그리스도인 (히 5:11-6:3)

remsleep73 2013. 6. 25. 16:48

바쁘다는 이유로 업뎃이 계속 미뤄져 왔습니다. 

설교를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된 요약까지는 여유가 없더라도 일단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글을 올립니다.





130602 철든 그리스도인 (5:11-6:3)


prologue. 성장과 성숙

여러분 혹시 성장성숙의 차이를 아십니까?

성장이란 외형이 점점 자라고 커지는 것이라면 성숙경험이나 훈련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성장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저절로 이루어지지만, 성숙은 특별한 노력이 없는 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한 만큼 성숙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장은 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흔히 철없다라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철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기분이 그렇게 좋질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철없다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뭔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몸은 어른이 되었는데 어린아이와 같이 기분대로만 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가 되었는데 돈벌이만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는데 자기 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장은 했지만 그에 걸맞게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철없는사람들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돈은 많은데 철이 없어서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르고, 배우기는 많이 배웠는데 철이 없어서 그것으로 못배운 사람을 사기쳐서 먹고 살며, 힘은 센데 철이 없어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사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하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숙이 함께 하지 못하는 성장은 자신과 타인의 삶에 큰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하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 맞게 성숙이 따라와 줘야 합니다.

 

1. 성숙의 어려움과 시도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성장은 저절로 되지만 성숙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드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먹는 것이 아니며, 지식이 많아지면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철이 들려면, 성숙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가는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사람은 힘든 것보다는 쉬운 것을 택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원을 다니다보면 항상 잔디 사이로 길이 나 있는 모습을 보곤합니다. 분명히 주변에 보도블럭으로 잘 딱여진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거리도 돌아가기 싫어서 들어가지 말라는 잔디밭 사이를 걸어갑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아예 잔디 사이에 길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철드는 것이 좋다는 것은 다 알지라도 실상 자발적으로 철들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이 혼탁하고, 싸움이 멈출 날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큰 아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를 기초로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게 만드셨고, 그 관계는 서로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끈으로 강하게 결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그 관계를 깨트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후로 세상은 온통 철없는 사람들의 천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배가 불러도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며,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즐기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과 폭력성은 인간 사회에 억압가 지배의 구조로 이루어진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인간의 욕심을 징계하신 바벨탑의 역사처럼 하나님께서 욕심으로 인해 철이 없어진 사람들을 다시 철들게 하시기 위한 역사입니다.

 

사람들을 철들게 하시려고 먼저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 철들어야 하는 필요를 배우긴 하지만 정작 철들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철드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고 단지 어떤 것을 해야 철드는 것이라는 지식만을 배우는 것에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참으로 철든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의 삶을 따라 철든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2. 철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철든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남편이 남편답게 철들이들고, 아내가 아내답게 철이들며, 권세를 가진 이가 권세에 맞게 철이 드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에 맞게 철이 드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철든 사람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철들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할 줄 알게 되고, 철들어서 욕심과 폭력을 절제할 줄 알게 되는 것이며, 철들어서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철든 사람들이 이룬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철든 사람들이 이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철든 사람들을 양성하는 곳이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식적으로 선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증인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철든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13-14, 현대인) 젖을 먹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아이라서 의의 말씀에 익숙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단단한 음식도 먹게 됩니다. 성인은 지각을 사용하여 계속 훈련함으로써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계속 훈련함으로써 선과 악을 분별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훈련행함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철없는 사람을 철들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곳이어야 합니다.

 

3. 사명을 감당해야 할 교회 공동체

문제는 실제로 교회가 훈련의 장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교회들은 이 사역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람들의 친목단체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성공과 출세만을 구하는 곳처럼 되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본질은 철없는 사람을 철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나에게 주신 것을 연약한 자들을 돌보게 하시려고 보냄을 받았음을 닮아감으로 인해 상처입은 이들을 돌보고, 근심걱정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평안의 위로를 전하며,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게 하고, 삶의 고통에 짖눌린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도록 철들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은 목적을 담아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4:18-19, 현대인) `주께서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니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 그가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짓눌린 사람을 풀어 주며 주께서 은혜 베푸실 때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명을 그분을 닮아감으로써 이루기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세상이 모르는 은밀한 비밀을 나누는 곳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누구라도 다 아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우리는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이루며 살아가려는 의지와 열망을 갖고 모였다는 점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거울삼아 자신을 치열하게 돌아보며 말과 행동에 있어서 자신의 사역에 걸맞은 성숙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4. 성숙을 가로막는 요인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약점 가운데 하나는 성장 지상주의에 빠져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맡길 때 그 사람이 사역을 맡을 만큼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장을 이루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오래 다니기만하면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한 것과 상관없이 의례히 직분이 주어지고,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은 금세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꿰어찹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결국 교회의 세를 부풀리기 위한 직분 세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판 면죄부 판매)

 

이러한 모습은 히브리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부잣집 아들이라고 초등학교 교장을 맡는 것처럼 신앙의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사역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역을 감당할 사람은 반드시 철들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자꾸 세상에 물들어 가다보니 영적 어린 아이가 교회의 직분을 맡는 일이 허다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 어린아이가 리더가 되니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을만한 일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자꾸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교회가 어린아이처럼 조롱 받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의 핵심 사역은 철든 교회’ ‘철든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초와 출발점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교회가 어떤 곳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길과 생명이 되며, 철든 삶을 사는 자가 누리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설 때 비로소 새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epilogue. 성숙을 위한 결단

이 핵심 사역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믿은 자들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먼저 믿은 자들이 철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히브리 저자의 말처럼 초보적인 교훈에서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가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장과 직원이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목회자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공동체의 사명은 예수님을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등불로 삼아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진 이들에게 철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고, 그것을 위해 공동체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삶도 성장하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 저자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6:3, 현대인)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지경이 넓어질 것이며, 공동체의 지경이 넓어지는 성장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성장성숙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성장은 중학교 여학생이 짙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위태 하게 걷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교회가 성장을 목표로 해 왔다면 저희 공동체는 성숙이 목표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단지 사람이 늘고, 건물이 커지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앞으로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관심은 우리 공동체에 속하고 있고, 속하게 될 이들의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성숙하게 하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러한 과정과 도전 속에서 우리가 성장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릇에 차고 넘치는 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은혜가 날마다 우리 가운데 차고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