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28 울지 말라
울지 말라
(누가복음 7:11-17)
지난 주 토요일 이영재 집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든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항상 힘이 드는 법이지만 오랜 시간 참으로 힘겹게 암으로 투병해신 것을 잘 알기에 한 층 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힘든 고통의 순간들 앞에서 항상 되뇌이는 질문은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좀 더 오래 함께 해도 괜찮을 좋은 사람을 서둘러 데려가시는 이유를, 힘든 상황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을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본문에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 울부짖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낸 과부입니다. 남편이 없는 힘든 삶을 살아가지만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삶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도 자신 보다 앞세우게 되고 만 것입니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되던 아들을 앞세운 어머니가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도 마음만 먹으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힘든 상황은 항상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잡을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둥이 부러지면 온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듯이 힘든 상황으로 부러진 감정은 삽시간에 온 마음을 무너트리고 맙니다. 게다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면 '마음을 잡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지경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울부짖는 이 여인에게 ‘울지 말라’(13절)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그와 같이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위로의 말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직면한 힘겨운 상황에서 무기력할 때 예수님은 그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울부짖던 여인의 눈물은 ‘슬픔의 탄식’에서 ‘기쁨의 감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변화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들으며 ‘그래서 뭐가 어떻단 이야긴데?’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것이 지닌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길 원합니다.
사람이 직면하는 고통의 상황은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 놀라운 이야기는 놀랍기는 하지만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크게 공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이야기가 지닌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상황이던지 말입니다. 미친 듯이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일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풍랑이 잔잔해 집니다. 병들어 지친 이의 삶에 예수님이 계시면 잃었던 건강이 회복됩니다. 이미 죽어 버려 모두가 절망하는 상황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예수님은 환경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문제 가운데서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이적을 목도한 제자들도 많은 사람들을 먹여야하는 문제 앞에서 고민했으며, 예수님이 잡혀가실 땐 두려움에 달아나 버렸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이상이 아닌 문제 상황 앞에서 예수님이 환경을 지배하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단히 성숙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은 반드시 현실의 상황을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성숙한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생각의 전환’이라는 주제로 지난주와 그 전에 계속해서 말씀을 나누어 왔습니다.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중심의 사고를 하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를 무상양도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말미암아 부정적 사고의 악순환을 벗어날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훈련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녀를 잃은 과부는 말할 수 없는 절망의 감정으로 아들의 관을 붙잡던 손을 거두고 예수님의 손에 그 모든 상황을 맡겼습니다. 오천명의 사람을 먹어야 하는데 그만한 돈도 시간도 없던 제자들은 어린 소년의 작은 도시락(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을 예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절망적 상황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는 훈련은 눈물로 붙잡던 관을 예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며, 작은 도시락을 예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어떤 절망적 상황에 놓여 있던지 그것을 붙잡고 절규하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의 손에 그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던 절망의 굴레에서 자유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항상 그렇듯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최선인듯 보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러분의 손으로 문제를 붙잡고 있던지, 부질없어 보이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손에 문제를 맡길 것인지..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손에 문제를 맡기길 원하신다면 지난주에 나눈 것과 같은 기도의 훈련을 하십시오.
먼저 삶의 모든 상황(기쁜 일 뿐만 아니라 슬픈 일도)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음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상황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기도 가운데 깨닫게 하신 것을 삶 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마 7:11) 바라기는 그 좋은 것을 날마다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