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소/설교요약

121014 기도의 방향

remsleep73 2012. 10. 10. 14:17

기도의 방향

(요 11:17-27)


어떤 사람이 사막을 건너다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마침 나침반과 지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나침반과 지도를 활용하여 가야 할 방향을 정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수정하지 않고 그냥 나아갔다면 그는 결코 사막을 무사히 건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기도란 ‘자기부정’임을 알았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기 위한 신앙적 결단입니다. 성경말씀이 삶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막 가운데서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과 지도라면 기도는 그것을 따라 가기위한 자기절제의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순종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생길 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영적집중력’입니다.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에 집중할 때에는 ‘어떤 것을 구해야 응답이 잘 올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에 응답이 없거나,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순종할 것인가에 집중하게 되면 응답이 없거나, 다른 것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기도한 것과 다른 응답(혹은 무응답)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나의 간구가 어디에서 불일치하는지? 집중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의 계획을 조정해야 할 필요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찰과 자기절제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바람이 서로 불일치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간극의 의미를 성찰하고 일치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채 무작정 기도에 메달린다면 이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위급해지자 예수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위급한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틀의 시간을 허비하며 더디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 지 나흘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에 상심이 잠긴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오지도 않았고 마르다는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위급함 앞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청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삶의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간구를 들으시고 일부러 이틀을 더 머물다 오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침묵하시거나 다른 것으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혹시 마르다 자매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심은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으셨다는 것이며 이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갖는 기대와 하나님이 갖는 기대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다가 나사로가 살아나니 기뻐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서운한 마음에 가득 찬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라고 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마르다 자매에게 기대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뜻과 기대가 좌절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조차도 잡혀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것(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을 피하는 것)을 기도하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기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며 자신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시키셨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본질이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절제시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그 어느 나라의 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시키기 위함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구에 하나님이 순종하길 원함인지?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여 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면 그 기도는 허공을 치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PILOGUE

사람은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바람을 나열하기만 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바람과 하나님의 응답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출발은 우리의 필요에서 시작되지만 기도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은 가장 복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임을 확신하는 순종의 기도가 여러분의 신앙에 날마다 더하여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