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23 영이신 하나님
(이번 주는 요약본이 좀 깁니다. 짧게 쓰려니 중요한 것이 빠지는 것 같아 길어졌으니 양해바랍니다.)
영이신 하나님
(요 4:20-24)
세상에는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일과 노력과는 상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일수록 노력해서 안되는 일은 없다는 신념이 강하며 동시에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곤합니다.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주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주도적인 사고방식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노력과 주어지는 것이 상관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기도하고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무런 노력없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공급받기도 합니다. 햇빛, 공기, 물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은 어디에 해당될까요? 그것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이 있는 일일까요? 없는 일일까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우리의 노력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까지 준비하는 과정과는 상관이 있지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과 하나님의 뜻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뜻을 알게 하실 때 모세는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사십일 금식 기도를 하거나, 일천번제를 드리거나, 작정 기도를 하였습니까? 이 일은 모세로써는 너무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써는 그를 향한 완전한 계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 속에서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하실 때 반응할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깨어 늘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실까요?
우리가 잘 알듯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우리는 이를 '성령'이라 부릅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은 '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불, 바람, 꿈, 환상, 입신, 초자연적 현상 등과 같이 가시적인 실체를 갖고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은 그러한 형태로 나타났던 성경적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가시적 현상자체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곤 합니다. 비가시적으로 임하시는 성령(감동, 회개, 용기, 고백, 진실, 사랑)의 임하심이 가시적인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 둘을 비교하는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성경적으로 말하면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없고, 그것을 강력히 제지하셨던 것을 감안한다면 가시적인 것보다 비가시적인 것이 더 하나님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시적이든 혹은 비가시적이든 물이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할지라도 중요한 건 그릇의 모양이 아니라 물이라는 본질이듯이, 어떤 형태로 임하실지라도 중요한 것은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 임하셨는지? 가 아니라 왜 임하셨는지? 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은 쇼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대상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성소가 있던 이 산(그리심 산)과 예루살렘을 언급합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특별한 장소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산도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현상에 함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찬양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동을 통해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엔 관심이 없고 감동만 쫓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감동을 통해 내가 무엇을 깨닫길 원하시는지 묻지 않고 더 감동적인 찬양, 더 감동적인 찬양을 하는 사역자만을 쫓아다닌다면 이것이 어찌 옳은 신앙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행2:1-3) 과 같은 형태로 성령이 임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신 형태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심)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던 이들이 문을 박차고 대로에 나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증거'하였다는 점입니다. 어떤 드라미틱한 현상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는지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그것이 삶을 통해 어떻게 증거되고 있는지가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더 영적이거나, 신령하다는 말은 기독교적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현상에 좌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모 모양의 그릇에 물을 넣었다고 해서 물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이 어떤 모양인가가 아니라 물 자체이듯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 그 뜻을 알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임재하심의 현상이 아니라 본질 즉 임재하심으로 알게 하시고자하신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이나 방법에 구애받지 않으신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 혹은 방법이 더 신령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종 목회자 혹은 신앙생활을 오래하거나, 특별한 은사가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다른 그리스인들보다 더 신령한 존재처럼 대우받거나, 대우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신령한 존재인가?가 아니라 각 자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느냐가 되어야 합니다.(역활, 사명의 차이)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본질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그 영광을 가로채는 무서운 행위일 뿐입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거짓교사와 거짓 예언자들이 출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알아가기 위해 타락한 자아를 성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 뜻을 알게 하심을 방해하는 내적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감리교회는 '성화'라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타락한 자아가 날마다 죽는 삶 곧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더욱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기 까지 그것을 가로 막은 내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 노력에 따른 결과로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게 되는 사건은 어떤 노력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권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의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약 자신의 내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에는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어떠한 방법이나 사람을 통해 알아내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신앙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현상이 아닌 본질을, 의존이 아닌 자성을 통해 나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자기비움의 결단이 날마다 삶 속에서 열매 맺어지길 원합니다. 그러면 아침안개와 같던 하나님의 뜻이 정오의 태양과 같이 명확하게 알게 되어지는 순간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