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통

250615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대하는 자세 (눅 22:1-6)

remsleep73 2025. 6. 14. 12:54

오랫만에 이번 주 설교원고 요약본을 '공개'로 업로드합니다. ^^


250615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대하는 자세 (눅 22:1-6)

(22:1-6, 개정)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우리는 살면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도 만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눈엣가시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듯,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드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주변에 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질과 성공은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당시 종교 기득권 세력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은 예수님을 불편해하는 것을 넘어 노골적으로 적대시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 발생한 여러 갈등 사건들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적대적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종교 기득권 세력이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협력한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정을 담당했으며, 공생애를 함께 보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돈 주머니를 맡았다는 사실은 그가 일정 부분 신뢰와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시사합니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진면목을 가까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주기로 결심합니다.


유다의 배신: 예정인가, 선택인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예정설에 따르면, 가룟 유다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배신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만약 사실이라면 예수님을 배신한 책임이 유다 개인에게 있기보다 하나님께 있다는 논리적 모순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악한 역할을 하도록 이용당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누가복음 22:3). 이는 사탄이 유다에게 영향을 주어 배신하게 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배신의 책임을 유다 본인에게 온전히 묻기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책임보다는 하나님이나 사탄에게 책임을 돌리는 해석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배신할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셨겠는가?'라는 전제를 지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선택과 행동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큰 계획의 일부이거나 사탄에게 조종당한 것이라는 해석을 통해 예수님의 완전성을 옹호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책임이 가룟 유다 자신에게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해석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사탄과 인간의 선택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사탄에 대한 개념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는 힘' 또는 '유혹'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할 것인지, 아니면 그 유혹을 극복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이 힘 또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선택은 그 힘과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힘이나 유혹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선택은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배신하는 선택을 한 책임은 가룟 유다에게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나 힘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결국 선택을 한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다의 실망과 감정의 폭주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이 부분은 추론의 영역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물리적인 해방, 즉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같은 정치적 의미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통해 자신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부탁했던 일이나, 그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그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가장 크게 실망한 제자는 현실적이고 계산이 빨랐던 가룟 유다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입성 후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그는 당황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빨리 태세를 전환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자신이 세우는 나라가 영적인 것임을 지속적으로 가르치셨지만, 이를 주의 깊게 받아들인 제자들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다른 예수님으로 인해 실망이 커지면서 원망이 생기고, 결국 분노와 적개심으로 발전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화가 났을 것이고, 그동안 공생애를 함께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의외의 사건이 아니라, 그로서는 충분히 논리적인 귀결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탄의 역할은 실망이 원망으로, 원망이 분노와 적개심으로 변하도록 부정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배신을 정당화하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우리 안의 유다

이러한 반응은 유다에게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뇌는 신경심리학적 관점에서 크게 파충류뇌(본능 담당), 변연계(감정 담당), 신피질(이성 담당)로 나뉩니다. 이 중에서 신피질은 가장 최근에 발달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오랜 세월 동안 대부분 본능과 감정에 의해 지배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본능과 감정을 통제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습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이성은 감정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견해도 있지만, 인간이 감정에 지배받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본능과 감정을 통제하기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은 결국 부정적인 요인을 부추겨 그의 본능과 감정을 자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성은 자신의 배신을 합리화하는 다양한 논리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폭주(1차)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급격히 가라앉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제 기능을 회복한 이성은 자신의 선택을 자책하게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유다는 자신을 향한 감정의 폭주(2차) 속에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우리가 유다의 선택과 행동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 또한 그와 같이 본능과 유혹 앞에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본능과 감정에 훨씬 더 취약해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본능과 감정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택의 기회 자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부정적인 요인에 자극받은 본능과 감정을 극복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자 성화의 과정입니다. 선택의 주체는 결국 자기 자신이며, 그 책임 역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히 나와 다른 생각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