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통

210926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요 8:31-37)

remsleep73 2021. 9. 28. 18:25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설교를 이곳에 오시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원고 그대로 올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만, 모처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원고 작성 그대로 올리는 것이라 문체가 딱딱한 점은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반말로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

 

210926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요 8:31-37)

 

1.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신학대학 입학식을 하던 강대상 위에 쓰여 있던 낯선 글자를 기억한다. 처음 보는 문자로 된 것이라 어떤 내용인지 읽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도 강당에서 채플을 드릴 때마다 그 글자는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언젠가는 읽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그 문자는 헬라어로 쓰인 문장임을 알게 되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John 8:32, TR) “και γνωσεσθε την αληθειαν και η αληθεια ελευθερωσει υμας

(8:32, 개정)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직역: 그리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여기서 진리란 사전적으로 가려져 있는 사건의 진상을 뜻하며 문맥상으로는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의미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자유롭게(해방)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치 깊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고 헛되이 삶을 낭비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존재 이유와 삶의 방향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2. 왜 그들을 진리를 듣고도 예수를 죽이려 하는가?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는 지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이들은 예수로 인해 자유로움을 얻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한다.(요 8:37)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은 예수를 배척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요 8:31) 이들이 아직 어떤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는 먼저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로 인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지금 진리를 듣고 있는 이들은 진리인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3. 진리의 공포

(8:32, 개정)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아주 짧은 문장이다. 그런데 이 짧은 두 개의 문장 사이에는 설명하지 않은 커다란 간극이 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속에 감추어둔 것이 드러나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인가? 아니다 대부분 진리를 안다는 것은 기쁨보다 공포에 가깝다.

 

진리인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 감추려 했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존경하던 스승의 추한 이면, 사랑으로 포장된 이기적인 욕망, 사람들은 진실을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적당히 포장하고 적당히 외면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건강한 삶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가에서 제공하는 무료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다. 혹시라도 검사를 통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검진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 실체를 보는 것은 두려움과 고통을 수반한다. 그래서 차라리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이기 조차 한다.

 

예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애써 만들어 놓은 모든 포장을 벗겨낸다.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보게 만든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며 부끄러움을 깨닫게 만든 대상에 대해 분노를 유발한다. 예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진리인 자신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 결국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4. 공포를 넘어

진리를 통해 진실을 아는 것이 공포에 더 가깝다면 어떻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이 의문의 답을 깨닫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정신적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공수부대원들은 ‘레펠’ 타워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한다. 그 높이는 10m 다. 인간이 최고의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0m기 때문이다. 10m에서 내려올 수 있는 담력을 기른 사람은 수천 미터 공중에서도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릴 수 있다. 그러나 10m를 뛰어내릴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낙하산을 메고 내려올 수 없다.

 

우리 삶의 진실은 다양하다. 매우 사소한 진실에서부터 매우 깊고 본질적인 진실에 이르기 까지. 작은 것이라도 진실이 주는 공포를 극복한 사람은 더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치 10m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수천 미터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외면하고 있었던 그 진실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32절은 이렇게 써야 맞다.

진리 (예수 그리스도) 로 인해 알게 될 진실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 때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사람의 삶은 온통 그럴듯한 변명과 누적되는 후회만이 남을 뿐이며, 그 삶은 점점 더 어두워질 뿐이다. 부딪혀 볼 수 있는 용기, 산산이 부서져 있는 진실의 실체를 대면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비록 아프고 더딜지라도 그만큼 더 성숙해지는 것이다.

 

이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진실 앞에서 회피하지 않을 용기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려 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믿음에 견고히 설 때, 위축되었던 우리 안의 용기는 다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주지만, '그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회복된 용기를 통해 두려움을 넘어 진정한 자유함에 이르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예수가 잡혀가자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 후에 들려온 새벽닭 소리 앞에서 깨달은 자신의 실체, 그 진실은 처절한 고통과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도 여전히 위축된 상태였다. 갈릴리 호수에서 다시 만난 예수는 그가 진실의 공포를 넘어서는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었다. 믿음 안에서 공포를 넘어선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진리인 예수로 인해 직면한 자신의 실상은 비참한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넘어섰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진리가 드러낼 진실 앞에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회피인가? 믿음을 통해 넘어서는 것인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8:32, 개정)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